후쿠오카 장마 기간(梅雨)과 언어의 정원 그리고 발포주 킨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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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는 일본어로 梅雨(츠유)라고 하는데, 어감이 굉장히 이쁘다. 번역하면 '매실 비 혹은 매화 비'

 어째서 이렇게 축축하고 꿉꿉하고 후덥지근한 기간에 저런 예쁜 이름이 붙게 되었을 까 찾아봤더니, 매화나무의 열매가 떨어질 즈음 장마가 끝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근데 일본에서 만든 단어가 아니라, 중국에서 만든 단어였다. 알고보니 감수성이 풍부한 나라였구나, 중국.



 사실 후쿠오카는 1주일인가 2주 전 쯤 梅雨入り가 발표됐었는데, 웃기게도 전혀 비가 내리지 않았었다.

 하지만 방심 시켜놓고 지치게 할 속셈이었는지...


 뜬금없이 최근 들어 폭우에 뇌우가 이어지고 있어서 너무 괴롭다.

 빨래가 마르지 않아서 30분에 천 원씩 내고 건조기를 돌려야 한다. 흐엉, 내 돈...

 게다가 회사 출근길이 너무 더워서 땀이 나고... 비까지 오니 바지랑 신발도 다 축축해지고 기분도 덩달아 찹찹해진다.



 오늘 새벽 2시에 11mm라는 예보가 나와있었는데, 좀 앞당겨 졌는지 어제 밤 10시쯤 시간당 16mm의 엄청난 양의 비가 쏟아졌다.

 베란다에 서서 비 내리는 걸 보는데 앞이 잘 안보일 지경이더라. 


 창문을 열어두어도 습기때문에 전혀 시원함이 느껴지지 않고... 하루죙일 에어컨을 틀어둬야 하는 이 장마...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참고로 장마가 끝나면 梅雨明け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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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 전혀 쓸데없는 얘기인데, 나는 梅雨入り宣言(츠유이리 센겐)이라고 해서 '장마 시작 선언' 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었다.

 우리나라 말로 쉽게 풀어보자면, '기상청이 오늘부터 장마가 시작되었음을 선언했습니다' 라는 느낌.


 근데 이번 포스팅을 쓰면서 찾아봤더니 이 宣言이라는 단어가 거의 안나오더라.

 옛날에는 이 선언이라는 말을 사용했었는데, 예보가 빗나가서 츠유이리 선언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비가 오지 않거나(올해 처럼), 츠유아케 선언을 했는데도 비가 계속 오는 경우에 불평전화 등으로 기상청이 굉장히 고통을 받았었다고 한다.


 그래서 최근에는 '츠유이리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 츠유아케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라는 애매한 문구를 사용한다고 한다. 웃기다.


참고로 이 표가 일본의 기상청이 장마 기간을 정리해둔 표.

대부분의 지역이 6월초부터 7월 중후반까지 장마 기간이구나. 오키나와는 벌써 끝났구나... 놀러가고 싶다.




 근데 이런 장마기간이 되면 꼭 떠오르는 애니메이션이 하나 있는데, 바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언어의 정원'이다.

 장마 기간에 비가 오면 학교 오전 수업을 땡땡이 치고 공원에서 신발을 그리는 소년이랑, 공원에서 대낮부터 맥주를 마시는 정체 모를 누나의 스토리인데, 나름 참 재밌게 봤었다. 


 ...사실 엄청 재밌게 봐서, 일본에 와서 한참 언어의 정원 소설책을 찾아서 서점을 몇 군데나 들어가곤 했었다.

 한국 발표 제목이 언어의 정원이라서, 서점에 들어가서 '言語の庭園'있나요? 하고 물어봤더니 점원은 '뭐죠 그게?' 라는 표정이었던 게 기억이 나네. 그럴만도 한게, 원제는 '言の葉の庭' 였으니까... 전혀 달랐다.


 어쨌든 그렇게 어렵게 어렵게 구입한 책, 전부 읽어보지는 않았고 반쯤 읽은 후 책장에 얌전히 꽂아 두었다.




 이건 언어의 정원 예고편인데, 보다보면 동영상 중간에 일본어로 된 캐치프레이즈를 보여준다.

 '愛'よりも昔、'孤悲'のものがたり

 바로 이 문구. 일본어로 그대로 읽어보자면 '아이요리모 므카시, 코이노 모노가타리'.

 직역하면 '사랑보다도 오래된, 사랑의 이야기' 이게 무슨 말일까?


 아마 유키노(여자 주인공)가 타카오(남자 주인공)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직접적으로 말해주는 대신 만엽집에 실려있는 일본의 와카(우리나라의 시조와 비슷) 를 알려준 것 때문에 이런 문구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 것 같다. 기발하지, 참.


 나는 일본어를 전공하기는 했지만, 古文(고문)은 수업을 잠깐 들었던게 전부라서 조금만 설명을 하자면...

 현대 일본어에서 사랑을 나타내는 글자는 ‘‘(아이) 랑 ‘'(코이) 두 가지가 있다. 정확하게 두 단어의 차이는 뭘까.


 내가 가장 와닿았던 설명은, '恋의 다음에 愛가 온다.' 라는 설명이었다.

 (코이)는 쉽게 말하자면 짝사랑. 내가 누군가를 보고싶고, 만나고 싶고, 얘기하고 싶어하는 사랑이고.

 (아이)는 그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고, 나를 희생하더라도 계속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하는 사랑이다.

 즉, 코이가 점점 자라서 아이가 된다는 것. 


 그리고 유키노가 타카오에게 알려준 와카가 실려있는 만엽집에서는, 이 의 当て字(아테지, 발음이 비슷하게 적당히 한자를 맞춰 적는 것.)로 孤悲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바로 캐치프레이즈에 있는 孤悲이다. 한자를 공부하신 분들은 아셨겠지만, 외로울 고, 슬플 비가 합쳐진 단어다. 그럼 '사랑 보다도 오래된, 외롭고 슬픈 사랑 이야기?' 뭐 이런 뜻이려나?


 근데 짝사랑을 이것보다 잘 표현한 단어가 있을까?

 외롭고 슬픈 사랑.



 하지만 우리나라 언어의 정원 포스터에 적혀있던 캐치 프레이즈는 '사랑, 그 이전의 사랑 이야기'

 번역이 참 어려웠을 것 같기는 하다. 나에게 당장 번역을 해라고 해도 어...라며 망설일 게 분명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우리나라의 포스터에 적혀있는 캐치프레이즈가 과연 일본어 캐치프레이즈에 담겨있는 깊은 의미의 절반이라도 담고 있을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의문이 든다.



 그리고 덤으로 타카오에게 유키노가 알려준 和歌(와카)에 대해서.

 「雷神の 少し響みて さし曇り 雨も降らぬか 君を留めむ」라는 일본의 옛 歌집 만엽집(万葉集, 만요슈)에 실려있는 와카인데, 번역하면 이런 뜻이다.

 '천둥소리가 들려오고, 구름은 끼는데, 비라도 오지 않을까. 그럼 당신을 붙잡을텐데.'


 와카는 남녀의 연애 감정을 5,7,5,7,7이라는 형식으로 적을 때도 많이 사용된 시조이기에 답가가 있는 경우도 있는데, 타카오는 그 답가를 찾아서 유키노에게 알려준다.

 「雷神の 少し響みて 降らずとも 我は留らむ 妹し留めば

 '천둥소리가 들려오고, 비가 오지 않더라도 나는 여기에 머물거에요. 당신이 잡아준다면.'

 처음에 유키노가 와카를 알려줄 때는 큰 의미가 없었겠지만, 타카오가 답가를 읊어주면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거겠지.



 더욱 자세한 이야기와 애니메이션의 분위기는 직접 보면서 느꼈으면 좋겠다.

 스토리도 좋았지만, 작화가 너무 잘 되어서 호평을 많이 받은 애니메이션이다.




 예고편에도 살짝 나오지만, 애니메이션을 보면 여자 주인공인 유키노가 신쥬쿠 공원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장면이 있다.

 실제론 공원에서의 음주는 금지되어 있다고 하지만...


 파란색 캔에 흰색 글자, 金麦(킨무기, 금색 보리), 그리고 노란색에 검은색 글자, 麦とホップ(무기토 홉프, 보리와 홉)라는 발포주도 나온다.

 맥주 맛 구별을 잘 못하는 내가 킨무기랑 무기토홉을 굉장히 좋아하는 이유다. 애니메이션에서 먼저 봐서 그런가? 색감도 좋고 느낌도 좋고 그렇다.


 내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의 맥주 사진들을 보면 발포주는 거의 모두 킨무기와 무기토홉이다. 참고로 킨무기는 산토리, 무기토 홉은 삿포로다.



 왜 하필 발포주였을까 하는 생각이 좀 들기는 한다.

 여성분들은 보리와 홉으로만 만든 프리미엄 몰츠 같은 맥주보다는 목넘김이 편한 발포주를 선호한다는 얘기를 들은적이 있는데, 그래서였을까?



 어쨌든 장마 기간이고 하니, 오늘은 메이지 초콜렛과 킨무기를 마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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